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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가이드
참이슬 닮은 ‘참좋은’?... 동남아 휩쓰는 ‘짝퉁’ 韓 소주 본문
지난달 말 싱가포르 도심에서 걸음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아랍스트리트 인근 유흥 구역 ‘하지레인’.
이 지역을 낮에 찾으면 마치 싱가포르의 ‘가로수길’ 같다.
좁은 골목 사이사이 콘크리트 벽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그린 창의적인 대형 벽화들이 즐비했다. 그 골목에 맞춰 문을 연 작은 상점들은 천편일률적인 찍어내기식 기념품 대신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공예품을 팔았다.
그러나 7시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하지레인 일대는 낮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공예품점은 문을 닫았다. 대신 전자악기 소리 혹은 라틴 음악 소리를 내뿜는 술집들이 높은 바 의자와 테이블을 가게 밖으로 꺼냈다.
자리를 마련하기 무섭게 선텍시티, 래플스 시티 같은 인근 사무실 밀집 지역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몰려들었다.
골목을 비집고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술집들이 빼곡하게 차는 데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싱가포르 대표 맥주 ‘타이거’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밤 10시가 지나자 또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우루루 빠져나갔다. 그 자리는 상대적으로 젊은 손님들이 메웠다. 이들은 맥주 대신 하이볼을 주문했다.
곧 자정이 다가오자 술집 대부분은 음악과 조명을 끄기 시작했다. 남아있던 손님 가운데 일부는 걸어서 5분 남짓한 버지스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지역은 서울로 치면 홍대나 신촌 같은 곳이다. 주류 규제가 엄격한 싱가포르에서도 늦게까지 술을 파는 가게들이 많다.
중국식 양념 생선구이 카오위(烤鱼)와 제육볶음 같은 한국식 술 안주를 두루 파는 한 식당에 들어섰다.
간단한 안주 몇 개를 시키자 자연스럽게 ‘술은 무엇으로 하겠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주인이 가리킨 커다란 업장용 술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자 미묘하게 어색한 우리말이 쓰인 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참좋은"
초록병에는 큼지막하게 흘려쓴 붓글씨체로 ‘참좋은’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써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렇지 않게 하이트진로(22,700원 ▼ 150 -0.66%) 대표 소주 제품 ‘참이슬’이라고 생각할 법한 겉모습이다.
글씨 뒷편으로 그려진 커다란 하늘색 물방울, ‘후레쉬(fresh)’라고 적힌 하늘색 알파벳 글씨 역시 참이슬을 빼다 박았다.
다시 앞면으로 돌려보니 오른쪽 위 상단에 익숙한 굴림체로 ‘깨끗하고 맛이 참 좋은 소주’라는 우리말도 들어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편 구석에 조그마한 글자로 ‘한국 최고 소주(Korean No.1 Alcohol Soju)’라는 영문이 보였다.
‘참좋은’은 싱가포르 옆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만들어 수출한 인도네시아산(産) 소주다. 인도네시아인이, 인도네시아 자본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만들어 자국과 싱가포르 같은 주변 국가에 판다. 우리나라 회사는 일절 제조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뒷면에 적힌 유통사 주소를 따라 인도네시아 프리마 악티프 누산타라사(社)에 문의하니 ‘제조 공정이나 유통 경로는 영업상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다’며 ‘동남아시아 내 판매량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최근 제품 종류를 늘렸다’고 답했다.
이 회사는 현재 참좋은 오리지널에 이어 라임, 리치, 파인애플 같은 과일향을 넣은 비슷한 제품을 함께 팔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찾아 보기 어려웠지만, 회사 설명대로 최근에는 일부 소비자를 겨냥해 ‘인삼맛’ 소주를 내놨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많은 테이블에서 이 ‘참좋은’을 여러 병 마시고 있었다. 꼼꼼히 살펴보니 이 식당에서는 눈에 익은 우리나라 소주 브랜드를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이들 ‘유사 한국 소주’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한 가격’이다.
싱가포르는 술에 관대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술 값이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비싸다. 우리나라 식당에서 375밀리리터(ml) 한 병에 보통 5000원 정도하는 소주가 일상적인 싱가포르 식당에서 18~20싱가포르달러(약 1만7500~1만9500원)에 팔린다.
그러나 ‘참좋은’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만든 소주는 훨씬 싸다. 이 식당에서 참좋은 1병 가격은 14싱가포르달러(1만3500원)였다. 참이슬 같은 국산 소주에 비하면 최대 30% 가격이 낮다.
싱가포르 뿐 아니라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같은 인근 동남아시아 국가 사정도 비슷하다.
동남아시아 최대 주류시장 태국에서는 현지 소주 업체 최소 4곳이 ‘선물’, ‘태양’, ‘건배’ 같은 우리말 상표를 한글로 적어 판매하고 있다. 이 가운데 ‘니르바나 하이’라는 브랜드는 대마초(CBD) 성분을 인위적으로 넣었다. 자칫 한국 국적 여행객이 우리나라 소주인 줄 알고 마셨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태국 시장에서 유사 한국 소주는 소매가 기준 1병에 85~90바트(약 3200~3400원) 정도에 팔린다. 135바트(약 5100원)인 순하리와 참이슬, 좋은데이처럼 정식 통관 과정을 거친 우리나라 술에 비하면 60% 가까이 싸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관계자는 “현지 소주 제조업체들은 인건비 부담이 한국 주류업체에 비해 훨씬 적고, 물류비나 재고 관련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며 “처음에는 영세한 기업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수박이나 열대과일 리치, 인삼처럼 현지 소비자들이 관심 있을 만한 맛과 향을 한국 주류업체보다 먼저 골라 상품화 하는 능력도 갖추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동남아시아는 인구가 7억명에 달하는 거대 시장이다. 우리나라 소주업계 1위 하이트진로 뿐 아니라 무학(5,900원 ▲ 150 2.61%)과 보해양조(605원 ▲ 0 0%) 같은 주요 소주 제조업체들이 일찍부터 이 시장에 진출했다.
초기에는 교민이나, 한국 음식 전문점에서만 소소하게 팔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 들어 본격적으로 한류(韓流)가 퍼지자, 동남아시아 소주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이트진로 베트남법인 매출은 2019년 86억원에서 129억원으로, 필리핀 법인 매출액은 2019년 1억원에서 2022년 80억원으로 뛰었다.
이 시기 이후 유사 한국 소주 역시 난립하기 시작했다. 2020년 이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 같은 주요 동남아시아 국가 젊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한국식 포장마차에서 한국음악을 들으며 소주를 마시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동남아시아 최대 라이프스타일 종합지 라이프스타일아시아의 제스로 강 시니어 에디터는 “팬데믹 기간 내내 온라인동영상플랫폼(OTT)을 키면 한국 유명 연예인들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드라마나 토크쇼에 여러 차례 나왔다”며 “이 장면을 동남아시아 젊은 소비자들이 따라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최근 2~3년 사이 소주를 팔지 않던 곳에서도 소주를 팔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만 우리나라 식당에서도 여전히 희석식 소주가 대부분인 것처럼, 동남아시아 식당 대부분이 희석식 소주만을 팔고 있었다. 심지어 주류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바(bar)에서도 증류식 소주를 갖춘 곳은 보기 어려웠다.
유사 한국 소주를 만드는 동남아시아 현지 제조업체들은 이 점을 노렸다.
희석식 소주는 순도 95%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추가해 만든다. 보통 소주에 쓰는 발효 주정은 쌀이나 보리, 밀 같은 곡물을 원료로 만든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들 곡물보다 저렴하고 당도가 높은 고구마나 타피오카를 쓰는 경우가 많다.
인도네시아는 널리 알려진 고구마 생산대국이다. 대상(19,030원 ▲ 300 1.6%)이나 이마트(83,500원 ▼ 300 -0.36%) 노브랜드가 굳이 인도네시아산 고구마를 이용해 고구마말랭이 가공품을 만들 정도다. 태국은 타피오카 전분 세계 1위 수출국이다. 우리나라 주정 제조업체 상당 수가 태국산 타피오카를 주정 원료로 사용한다.
앞서 2010년대 후반 유사 한국 소주를 만들던 동남아시아 현지 제조업체들은 주정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안정적으로 불순물을 걸러내거나 잡맛을 제거하는 기술도 부족했다. 소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물을 대규모로 여과할 장비를 갖춘 곳도 드물었다.
그러나 화교 자본이 개입하고, 이전에 다른 증류주를 만들던 중견 기업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참좋은’은 인도네시아 경제를 주름잡는 화교 출신 자본가가 회사 주요 주주인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행복한 소주’는 와인을 증류시킨 술 ‘브랜디’를 만들던 엠페라도르가 만든다. ‘행복한 소주’는 하이트진로 ‘자몽에 이슬’, ‘청포도에 이슬’을 글자체까지 그대로 본 딴 제품을 팔고 있다. 태국 ‘태양’ 소주는 영국 프로축구리그 후원까지 하는 에너지 드링크 대기업 카라바오의 자회사가 만든다.
이들은 2020년 이후 원재료 가격 경쟁력에 인건비, 물류비, 세금의 이점을 활용해 본격적으로 희석식 소주 제조에 나섰다. 자본력과 기술력이 결합하면서 제품 수준이나 마케팅 기법도 이전보다 눈에 띄게 나아졌다.
인도네시아 ‘대박’ 소주는 한국인 모델을 기용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젊은 소비자를 상대로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태국 ‘건배’ 소주는 우리나라 브랜드는 사용하지 않는 ‘젤리맛 소주’를 개발했다.
유사 한국 소주가 동남아시아 시장을 휩쓰는 사이 우리나라 주류 업체가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다. ‘한국산’이라는 독창성이 가격 경쟁에 밀린 탓이다. 관세청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소주 수출량은 2018년 755톤에서 2020년 1000톤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지난해 940톤으로 미끄러졌다.
필리핀 수출량은 2018년 3155톤에서 지난해 1434톤으로 대폭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주요 주류업체들이 지나치게 안이한 전략으로 동남아시아 주류 시장에 접근했다고 분석했다. 현지에서 국내 주류 브랜드 인지도는 현저하게 낮은데, 그저 ‘다들 한류 팬이니 한국 소주라고 하면 안정적으로 팔릴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비판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관계자는 “여건상 이들 유사 한국 소주와 같은 제품 콘셉트를 가져가면서 가격으로 경쟁하기는 불가능하다”며 “동남아시아에서 만든 소주가 기술적으로 나아졌다고 해도, 아직 우리나라 소주가 잡냄새나 인위적인 첨가물 맛이 보다 현저하게 적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동남아시아 시장이 고도화될 수록 유행을 이끄는 젊은 소비자들은 한국 소주가 조금 더 비싸도 이 차이를 느끼기 위해 돈을 쓸 가능성이 크다”며 “그 다음에는 한국 소주와 한국 맥주를 섞어 마시는 음용 방법을 널리 알리는 식으로 ‘진짜 한국 소주, 이렇게 마신다’는 오리지널리티를 부각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