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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장과 은행장의 어색한 크리스마스 캐럴

오팔86 2019. 12. 26. 21:39

크리스마스가 하루 지난 26일 오전, 서울 중구의 구세군중앙회관에는 윤석헌 금융감독원장과 시중은행장들이 모였다. 금감원과 금융업계는 2011년부터 매년 '아름다움 나눔' 성금 전달식을 열고 있다. 올해는 금감원과 25개 금융회사가 모두 13억4000만원을 모금해 구세군에 전달했다.

이금희 아나운서의 사회로 1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날 행사는 어린이 합창단이 대미를 장식했다. 윤 원장과 은행장들이 단상에 서 있는 가운데 어린이 합창단이 행사장에 입장해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과 캐럴을 부르며 귀여운 안무를 선보였다. 좌중에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윤석헌(왼쪽 네번째) 금융감독원장과 금융회사 CEO들이 아름다움 나눔 성금 전달식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윤 원장과 은행장들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이날 행사에는 진옥동 신한은행장, 지성규 KEB하나은행장,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박진회 한국씨티은행장 등이 참석했다. 행사 시작 전 VIP 티타임에서도 이들 은행장과 윤 원장은 첫 인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을 섞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진 행장만 간간이 미소를 띠었다.

이유가 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은행들은 최근 금감원이 키코 사태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에 손해배상을 하라고 권고한 곳들이다. 금감원은 최근 금융분쟁조정위원회를 열고 11년 전 키코 사태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 4곳에 은행들이 손실액의 15~41%를 물어주라고 결정했다. 은행별로 신한은행이 150억원, 우리은행 42억원, KEB산업은행 18억원, 한국씨티은행 6억원 등이다. 금감원의 권고 이후 윤 원장과 은행장이 공식석상에 마주한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은행 입장에서는 손해배상 시효(10년)가 지났기 때문에 금감원 권고를 수용할 의무는 없다. 금감원 권고를 수용하면 경제적 손실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배임에 대한 우려도 있다. 금감원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은행들은 법률 리스크를 따지며 신중한 분위기다.

금감원은 은행이 분쟁조정안을 수용하도록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윤 원장은 지난 23일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가장 잘한 업무로 키코 분쟁조정을 꼽기도 했다. 그는 "키코 사태는 도움을 구하는 고객에게 은행이 큰 손실을 입히고 심지어 망하게 만든 것"이라며 "고객과의 신뢰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은행들이 대승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공개된 키코 분쟁조정 결정서에서는 은행들이 키코를 판매하면서 환율상승 예측치 자료를 생략한 사실도 확인됐다. 금감원이 직접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아니지만, 우회적으로 은행들을 압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분쟁조정 결정서를 받은 은행들은 20일 안에 조정안을 수락할 지 결정해야 한다. 은행들이 조정안을 수용하면 이번에 조정 결정이 난 4곳의 중소기업 외에 나머지 피해기업 145곳과도 자율조정을 거치게 된다. 은행들이 물어야 할 배상액은 대략 2000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어린이 합창단의 앙증맞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는 사이 수천억원을 둘러싼 피말리는 신경전이 함께 펼쳐진 셈이다.

행사가 끝나고 윤 원장과 은행장들은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서둘러 행사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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